역사에 기록된, 문명 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
카데시 전투(Battle of Qadesh/BC 1308년- BC 1274년)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 vs.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 2세
소설 <람세스>의 클라이맥스, 전후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 체결됨
왜 일어났을까?
팔레스타인 지역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두 왕국. 람세스 2세가 즉위하며 기존 히타이트의 동맹국이었던 아무르를 이집트의 동맹국으로 가져갔고 이에 격분한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2세가 응징을 결심했다. 즉위 5년째를 맞은 29세의 혈기왕성한 람세스 2세도 이 기회에 히타이트와의 정면승부를 결심하고 병력을 동원했다.
히타이트(추측) : 대략 보병 4만, 전차 3700여 대, 용병 1만 1천
이집트(추측) : 대략 보병 1만 6천, 전차 2천여 대, 용병 4천
히타이트 군이 2배 이상 전력을 동원했는데,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당시 이 두 국가가 유일했을 것이다.
현재의 레바논-시리아 국경 근처 오론테스 강의 카데시로 진격한 두 군대는 공방전을 벌였다.
역사는, 새로운 기록의 발견으로 달라진다.
이집트의 거대한 아부심벨 신전에는 절체절명의 순간, 람세스 2세가 신으로 변신해 적을 쓸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르낙, 룩소르 등 이집트의 다른 신전에도 이 전투의 자세한 경과가 기록되어 있다. 카데시 전투는 이 기록에 의존해 지난 3000년간 '이집트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보아즈칼레(히타이트의 수도/옛이름 하투샤)에서 출토된 석판에서 히타이트의 상세한 전적보고서를 발견하면서 전투의 결과는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무승부로 보거나 히타이트가 다소 우세했던 것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①이집트가 원래 목표인 카데시 탈환에 실패했다는 것. ②이집트에 우호적이었던 주변국들이 전투 후 히타이트에 투항했다는 것. 그러나, 히타이트의 완벽한 승리로 보기도 어렵기에 무승부로 보는 의견이 대세다.
4천 년 전, 평화와 공존을 꿈꾼 사람들
전투 후 16년이 지난 기원전 1258년, 조카(히타이트 무와틸리스 2세의 아들)를 내쫓고 왕이 된 하투실리스 3세는 여전히 이집트의 왕인 람세스 2세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람세스 2세가 이에 호응했고 기원전 1259년 '카데시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왕위를 찬탈한 하투실리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내부 불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은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면서 이 조약의 존재가 밝혀졌다.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약의 내용>
1. 양국은 평화를 지속한다. 아들과 손자 이후 세대 모두에게 평화조약은 적용된다.
2. 서로에게 공격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3. 상대국의 정치범과 범법자를 만날 경우 즉각 송환에 나선다.
4. 자국 내에서 발생한 반란범은 서로 도와서 근절한다.
조약 이후 히타이트가 멸망할 때까지 정말 두 국가 간에는 평화가 유지된 듯하다. 이 조약문의 원본은 하투샤 지역이 있는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튀르키예는 1970년 복제품을 만들어 UN에 기증했다.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이 되어 현재 UN 본부 안보리회의실 복도 벽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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