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족은 누구?
쿠르드족은 현재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튀르키예에 걸쳐 살고 있는 민족이다. 인구는 약 3500만명. 독립국가가 없는 민족으로는 가장 인구가 많다. 단일 혈통이나 인종, 종교로 구분하기 보다는 여러 민족이 오랜 시간 쿠르디스탄 지역에 살면서 융합되어 같은 문화와 언어를 쓰게 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500여 개가 넘는 부족이 다양성을 유지한 채 살고 있으며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다.
오스만 제국 시절,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 자치주에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에게 독립을 약속받고 참전했지만, 로잔 조약(현대 튀르키예의 국경을 설정한 조약)으로 영국에게 배신당했고,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국경선에 따라 이란, 이라크, 시리아, 튀르키예에 흩어지면서 쿠르드족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후 80년 간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쿠르드족의 노력은 모두 무산되었다. 4000년 역사, 3500만여 명 인구, 고유 언어와 문화 등 단일민족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중동의 집시’라는 얘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동네북이 될 위치에 있었던 쿠르드 족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메데 족이 쿠르드족이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산악 민족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라크 북부 지역은 동서양 문명이 부딪칠 때면, 분쟁에 쉽게 휘말릴 수 있는 지역이었다. 로마가 페르시아 쪽으로 진군하던 때 그 문턱에 쿠르드족이 있었고, 오스만튀르크가 남쪽으로 진격할 때도 쿠르드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말그대로 동네북이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에서 걸핏하면 남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쿠르드족은 변변한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안팔 작전, 이라크가 벌인 쿠르드족 인종청소
이라크 북부에 사는 쿠르드족은 이라크 공용어인 아랍어 대신 쿠르드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아랍 사람들과 다르다. 아립인은 그런 쿠르드족을 산악 민족이라며 얕보았고, 이라크 내에서 쿠르드족은 취직은 물론 주요 공직에도 올라갈 수 없었다. 이런 차별을 겪으며 쿠르드족은 이라크 정부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이란은 쿠르드족이 이라크를 상대로 싸울 수 있도록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 쿠르드족으로서는 이라크와 싸워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고 그동안의 설움을 씻을 절호의 기회였기에, 이란에서 받은 돈으로 전사를 모집하고 이라크와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쿠르드족은 이 전사들을 '페슈메르가'라고 불렀는데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페슈메르가를 앞세운 쿠르드족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쿠르드족의 나라, 쿠르디스탄을 세우기 위해 칼을 갈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귀에 반란 정보가 먼저 들어갔고, 그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담 후세인은 즉각 쿠르드족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쿠르드족에게 ‘이란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1987년부터 3년간 쿠르드족 인종 청소인 '안팔 작전'을 벌여 쿠르드족 19만 명이 죽고 쿠르드 마을 3천 곳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 중 '할라브자 학살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1988년, 이라크 북부 할라브자라는 마을에서 사담 후세인이 화학무기로 어린이와 민간인을 비록한 쿠르드족 5천 여명을 한꺼번에 학살한 사건이다. 사담 후세인이 이 학살을 직접 지시했으며 그의 사촌이자 오른팔로 '케미컬 알리'라 불리는 알리 하산이 진두지휘했다고 알려져다. 그는 할라브자에 사린 가스와 겨자탄 등 4-5종의 화학무기를 사용해 5시간만에 주민들을 몰살했고 그 가운데 3,300명이 여성와 아이였다.
그러나 세계는 후세인의 이러한 만행에 대해 침묵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이라크에서 벌어진 일이지 자기들과는 상관없다며 모른 척했다.
이라크 쿠르드족,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다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면서 1차 걸프전이 일어났다. 후세인이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에 쿠르드족은 다시 한번 쿠르디스탄을 세우기 위한 시도를 벌인다. 이번에는 미국이 쿠웨이트를 지원해 후세인과 맞서면서 쿠르드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쿠르드족의 나라 세우기 계획은 후세인의 분노만 사고 실패했다. 분노한 후세인은 한창 걸프전을 치르는 중에도 군대를 동원해 쿠르드족에 대한 복수에 나섰고, 250만 명의 쿠르드 족이 피란길에 올랐다. 그동안 후세인에게 잔인하게 당했던 쿠르드족은 이번에도 대학살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무조건 도망쳤다.
어마어마한 탈출 행렬이 터키 국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터키도 자국 내 쿠르드 족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쿠르드족이 터키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리 없었다. 터키는 결국 국경을 폐쇄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쿠르드족 피난민은 눈 덮인 산에서 식량이나 물은 물론 텐트도 하나 없이 얼어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에 놓었다. 굶주림과 병과 추위에 시달리다 죽는 어린이와 노약자가 매일 천명이 넘었다.
세계는 쿠르족의 비참한 상황에 이제서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계 언론은 그 책임이 후세인에게 대항하라고 쿠르드족을 부추긴 미국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라크의 안팔 작전 이후 쿠르드족이 다시 후세인과 대항할 용기를 낸 것은 미국이 뒤에서 쿠르드족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싸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궁지에 몰린 쿠르드족을 나몰라라 했다.
미국의 도움? 그리고 이라크 쿠르드족의 재기
그러나 언론이 끈질기게 쿠르드족의 비극을 보도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마지못해 쿠르드족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1992년 4월 16일, 부시 대통령은 미군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직접 투입해 이라크군의 접근을 막고 난민촌을 만들어 쿠르드족을 돕겠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쿠르드족은 터키와 이라크 국경에서 죽어가다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95년 4월, 쿠르드족은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쿠르드족 망명의회를 세웠다. 쿠르드족 망명 의회는 각종 국제기구에서 쿠르드족을 대표함을 선포했다. 쿠르드족 위성방송인 MED TV가 영국에 세워져 하루 3시간씩 쿠르드어 방송을 시작했다. 여러 나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쿠르드족에게 모국어로 방송하는 이 TV가 힘을 더해주었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축출하자 쿠르드족은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게 되었다. 새로 이라크 대통령이 되었던 잘랄 탈라바니는 핍박받던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서러운 셋방살이를 하던 쿠르드족에서 대통령이 나와 이라크를 통치한다는 사실만으로 쿠르드족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쿠르드족은?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사담 후세인의 몰락 이후 안정을 찾았지만, 다른 나라의 쿠르드족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터키에 사는 쿠르드족은 터키 정부와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압둘라 오잘란이 1984년 조직한 쿠르드노동자당(PIKK)은 쿠르드족을 차별하는 터키 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터키 남동부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신출귀몰하며 터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이끌었고 쿠르드족에게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압박해 오자 시리아로 도망쳐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터키 정부는 시리아에 오잘란을 내놓지 않으면 군사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고 쿠르드족을 좋게 보지 않던 시리아 역시 오잘란은 압박했다. 오잘란은 결국 시리아를 떠나 그리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을 떠돌며 무장투쟁을 이어가다가 1999년 2월, 아프리카 케냐에서 터키 정부가 보낸 특공대에 체포되어 지금까지 터키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오잘란은 체포되었지만 쿠르드노동자당은 터키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으며 터키 정부는 쿠르드 노동자당을 잡기 위해 이라크 국경 너머로 병력을 투입하기도 한다. 터키 공공기관에서 쿠르드어로 연설하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불법이다.
IS 소탕에 동원된 쿠르드족
한편, 2011년 시리아 내전은 쿠르드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IS가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며 내전이 커지자, 미국은 IS를 막기 위해 쿠르드족을 불러들였다. 미국은 쿠르드 민병대가 IS를 소탕해주면 쿠르드족의 희망, 쿠르디스탄을 국제적으로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무기까지 지원해주었다. 여러 차례 미국에 속아왔지만, 쿠르드족 민병대는 또다시 IS 소탕 작전에 올인했다.
그러나, 2017년 IS 소탕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라크 아르빌 기반의 쿠르드 자치정부인 KRG가 분리 독립 찬반 투표를 시행해 77.8%의 투표율에 91.8%의 찬성률로 마감했다. 그러나 쿠르드자치정부는 바그다드의 중앙정부와 협상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미국 역시 쿠르드족을 말렸다. 쿠르드족은 아르빌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에 몰려가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는 눈물의 항의시위를 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쿠르디스탄이 걸쳐 있는 4개국이 영토와 인구를 내놓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2019년에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동북부에서 미군을 철수하면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지역에 사는 시리아 쿠르드족이 미군에 협력해 IS를 물리쳤으나, 미군 철수로 시리아 쿠르드족에게는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었다.튀르키예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쿠르드족이 손잡고 독립국가를 세울까 우려해 즉각 군대를 보내 시리아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잔혹한 살육전이 벌어지고 피비린내 속에 쿠르드족은 또다시 희생되었다. 이번 일로 미국은 지난 100년간 쿠르드족을 최소한 8차례 배신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레이건·클린턴도 배신···쿠르드족, 美에 100년간 8번 당했다
━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동북부 주둔 미군을 철수하면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지역에 사는 시리아 쿠르드족이 미군에 협력해 중동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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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은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까
쿠르드족은 독립국가가 없으므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월드컵에 출전 못하는 작은 나라나 소수민족들의 ‘대안 월드컵’인 ‘비바 월드컵’에 2008년부터 출전하고 있다. 유럽의 작은 왕국 모나코, 이탈리아의 ‘파다니아’, 남프랑스의 ‘오시타니아’, 북키프로스 축구팀이 쿠르드의 경쟁상대들이다. 이란은 레슬링으로 유명한데 쿠르드족 선수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터키의 태권도 선수 누르 타타르도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의 속담에 “친구가 아니라 산을 벗하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배반의 역사 속에 살아왔던 쿠르드족의 역사와 지혜가 녹아든 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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