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는 누구?
호메로스는 기원전 800년 무렵 그리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옛부터 전해 오는 재미있는 신화나 전설을 들려주는 음유시인이었다. 이 당시 음유시인들은 암송하기 쉽고 듣기 좋도록 노래 부르듯 운율에 맞춰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그리고, 시각장애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보이지 않는 만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호메로스의 최고 인기 레퍼토리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였다. 호메로스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해 인간과 신이 두 편으로 갈라 싸운 이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누었는데, 전편은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 이야기, 후편은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로 돌아오던 길에 그리스 오디세우스 장군이 바다에서 겪는 모험 이야기였다.
후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호메로스는 자신의 이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하기로 했다. 마침 페니키아 문자를 모방한 문자가 만들어져 널리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호메로스는 노래 부르듯이 말하는 평소의 이야기투를 그대로 글로 옮겼다. 전편에는 <일리아스>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트로이의 옛 이름이 일리온이니 '트로이 이야기'라는 뜻이다. 후편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오디세이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최초이자 최고의 서사시로 꼽히며 그리스 암흑시대의 끝이자 새로운 문명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일리아스> 속 트로이 전쟁 이야기
어느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제우스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가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신들은 서로 자신을 뽑아달라며 파리스에게 달콤한 약속을 했고 파리스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을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뽑았다.
아프로디테가 말한 여인은 제우스의 딸이자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네였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헬레네를 납치해 트로이로 돌아왔고 분노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형인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구성하고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트로이를 침략했다.
전쟁 초반, 그리스 최고의 장수인 아킬레우스를 앞세운 그리스군은 트로이 동맹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으로 얻은 여인을 아가멤논 왕이 가로채면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전쟁터에서 철수해버렸다. 이때부터 그리스군은 기세를 잃고 트로이군에게 역공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뒤늦게 아가멤논 왕이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사과하며 전쟁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아킬레우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그리스 편과 트로이 편으로 나뉘고 신들도 두 편으로 나뉜 가운데,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신들은 자기 편이 불리하면 어떻게든 도와주었기에 전쟁은 끝날 줄 몰랐다.
그러던 중, 트로이군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그리스군을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그리스는 전쟁 이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파트로클로스는 끝까지 전투에 나서지 않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아킬레우스의 용맹을 익히 아는 트로이군이 아킬레우스의 갑옷만 봐도 후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부탁에 자신의 갑옷을 빌려주면서, 트로이군이 후퇴를 하더라도 절대 뒤쫓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그 당부를 잊고 후퇴하는 트로이군을 뒤쫓아 트로이 성까지 쳐들어갔고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의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다짐했다. 결국, 헥토르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트로이 성을 빙빙 돌았다. 신들은 이런 아킬레우스의 행동에 분노했다. 헥토르가 죽은 후 3일 째,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파리스는 아폴론 신의 활을 빌려 불사신이던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아킬레스건)를 명중시켰다. 그렇게 아킬레우스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인 아킬레우스를 잃고 고민에 빠진 그리스군. 그때 그리스의 장군 오디세우스가 한가지 꾀를 냈다. 그리스군은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안에 군사들을 숨긴 것. 목마에 '그리스군이 철수하면서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글귀를 새겼고 트로이 성 안에 첩자를 심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면 그리스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도록 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려 했지만,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과 예언자 카산드라는 이를 그리스의 계략이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바다에서 두마리 뱀이 나타나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칭칭 감아 죽였고, 트로이 사람들은 라오콘이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 여겨 서둘러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게 되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전쟁 승리를 기뻐하며 밤새 축제를 열었고, 그들이 잠든 사이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조용히 목마에서 내려와 성 안에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었다. 이미 성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군이 일제히 성을 공격해 들어왔고 10년 간의 트로이 전쟁은 그렇게 트로이의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트로이 전쟁, 실제 역사임을 밝히다.
트로이 전쟁이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 역사임이 밝혀진 것은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 덕분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그림 세계사』의 불타는 트로이 성 삽화를 보고 이 이야기를 사실로 굳게 믿은 슐리만은 언젠가 그것을 찾아내리라 결심했다.
그는 먼저 사업가로 되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에서 무역으로 큰돈을 버는 동시에 그리스어를 단 6주 만에 마스터했고, 이어 라틴어·아랍어, 고고학도 공부했다. 1863년 말, 목표를 초과하는 재산을 모은 슐리만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업무용 배를 모두 불태웠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작업은 1870년 4월 시작되었으나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늪지대의 모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깨끗한 물도 부족했다. 인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행정기관의 업무 처리도 굼떴다. 게다가, 호메로스 이야기의 역사성을 의심한 학자들은 그를 바보 취급했다. 그러나 슐리만은 열정 하나로, 트로이가 실재했던 성이며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임을 밝혀냈다. 그는 발굴 당시 <일리아드>를 안내자로 삼았는데, 실제 그가 발굴한 유적은 대부분 거기에 적혀있는 그대로 있었다. 트로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250년 무렵 도시가 불탄 흔적까지 확인되었다.
1873년, 슐리만의 발굴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자 유럽은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 학자든 일반인이든 만나는 사람마다 온통 트로이 이야기였다. 그러나 슐리만은 조국 독일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학자들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이유로 공격했다. 물론 슐리만의 서툰 작업 방식으로 일부 유물이 파괴됐고, 그의 연대 확인도 대부분 오류로 판명되긴 했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트로이 문화’ 자체를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스의 흔적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슐리만의 장례식은 그리스 국왕과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테네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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