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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드라마, 영화

사라지는 집중력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 너머너머'를 보여주는 책 - <도둑맞은 집중력>

by 꼬북11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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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도 휴대폰 알람이 울리면 휴대폰에 손이 간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종종 딴 생각을 해 대화를 놓친다. 어디론가 가다가 갑자기 내가 왜 가고 있지 기억이 안 난다. 기분이 안 좋으면 그냥 몇 시간이고 휴대폰으로 의미없는 컨텐츠들을 보며 시간을 때운다. ADHD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내가... 그렇다. 나의 집중력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다. 진득하게 앉아서 무언가를 끈기있게 해내던 젊은 날의 나는 없다. 휴대폰 탓이 큰거 같긴 한데, 뭐 결국은 내 탓이지 뭐. 
집중력의 부족을 진단하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결론은 그래도 '집중하자!"라는 메세지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도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느끼지 못한 테크기업의 시스템부터 식산업구조, 사회안전망 등 사회구조적 문제를 언급한 후, 마지막으로 교육에 대해 다룬다. 대륙을 넘나들어 연구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저자의 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일에서부터! 일단 잘 자자! 그리고 무한 스크롤의 함정에 빠지지 말것. 음식은 신선식품(?) 위주로 건강하게. 휴대폰과 영상에 매여 있기 보다는 딴생각을 통해 생각 확장하기. 몰입할 수 있는 일 찾기. 적절히 난이도 있는 태스크로 시작해보자.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제목, 

팩폭이고 쓰린 말이지만 맞는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집중력(깊이 사고하는 능력)을 잃고 전자기기에 의존하는 자신을 바꾸기 위해 3개월 간 케이프코드의 프로빈스타운(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해안마을)으로 디지털 디톡스 여행을 떠난다. 휴대폰을 떼어 놓고 워드 프로그램만 가능한 구식 노트북만을 들고 조용한 해안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것. 그러나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저자는 '몰입'의 경험을 통해 그 시간을 채워나가게 된다.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이 말했다. "암벽 등반의 신비는 암벽을 오르는데 있어요. 정상에 도착하면 다 끝나서 기분이 좋지만 사실은 영원히 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암벽 등반을 하는 이유는 오르는 행동에 있어요. 시를 쓰는 이유가 쓰는 행위에 있듯이요. 정복해야 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는 건 뿐이에요. 글쓰는 행위가 시의 이유에요. 등반도 마찬가지죠. 내가 흐름 속에 있음을 인식하는 거에요. 흐르는 것의 목표는 계속 흐르는거에요. 정상이나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 안에 머무는 거에요.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는 거에요. 그 흐름을 지속하기 위해 위로 오르는거죠.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상태에 '몰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몰입은 하고 있는 일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모든 자아 감각을 잃은 상태, 시간이 사라진 듯한 상태,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을 탄 상태를 뜻한다. 몰입은 우리가 아는 것 중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다. (85쪽)

몰입에 빠져 들기 위한 조건
1)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 선택 - 한번에 하나만.
2)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에 집중
3) 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는 않는 일-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기
- 우리 내면에는 오랜 시간 집중하고 그 상태를 즐길 힘이 있으며 그 힘이 흐를 수 있는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우리가 더욱 행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89쪽)

 


 
엄청난 양의 정보가 빠른 속도로 들이닥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이 빠지고 소진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한두 개밖에 할 수 없는 뇌를 가지고 '멀티 태스킹'을 하며 뇌를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는 엄청난 전환 비용과 실수,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수면의 부족도 문제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는 '순간 주의 상실'을 가져오고 집중력을 낮추며 기억력과 창의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화면에 집중하면서 점차 독서는 붕괴했고 '긴 텍스트를 읽는 능력'을 잃게 되었는데 이 또한 집중력 감퇴의 증상이자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우리 능력에 부담이 되고 결국 능력이 저하된다.(57쪽)


일상에서 너무 오랜 시간 방해를 받으면 모든 외부의 방해에서 벗어났을 때 스스로를 직접 방해하기 시작한다.(76쪽)

인간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활력이 솟게끔 진화했다. ...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빛을 통제한다. 해가 지는 시간을 결정할 수 있다. 자겠다고 마음먹는 순간가지 계속 환한 빛을 켜두거나 침대에서 핸드폰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경우, 조명이나 핸드폰을 끌 때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이 신체 반응을 일으킨다. 인간의 몸은 갑작스로운 빛의 감소를 일몰로 여기고 우리가 다시 동굴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 "오늘날 이처럼 잠을 깨우는 힘은 해가 지는 6시 이전인 오후 서너시가 아니라 밤 10시나 11시, 아니면 자정에 밀려듭니다. 잠을 잘지 말지 결정하는 시간에 잠을 깨우는 활력이 생기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죠. 오늘 밤에는 기필코 더 많이 자겠다고 맹세합니다. 하지만 저녁에는 피곤하지가 않아요." (116-117쪽)

우리는 책에서 화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책에서 나오는 더 깊은 형태의 읽기 능력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책을 더욱더 안 읽게 되었다. (127쪽)

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는 목소리의 결을 내면화한다.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는 더 상스럽고 시끄러워질 것이며,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에 전만큼 귀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의식이 그 기술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38쪽)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딴생각의 힘"!

 
한편, 집중에는 스포트라이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명 '딴생각'- 우리 생각이 눈앞의 초점에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닐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데, 이 때 정신이 표류하면서 상황을 이해하게 되며 서로 다른 것을 새로이 연결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창의성이 발휘된다. 눈앞의 사안이 아닌 다음에 일어날지 모를 일들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다. 딴생각은 집중의 다른 형태이며 딴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주의를 좁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일정량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스포트라이트를 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 라고 말했다. 그저 다른 사고방식에 "에너지를 더 많이 할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력이 꼭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다른 중요한 형태의 사고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149쪽)

 

교실에서 딴생각을 하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는 가장 쓸모있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150쪽)

 

그렇게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도 딴생각은 왜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들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딴생각은 쉽게 반추로 빠진다. 대다수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집중하기를 멈추고 마음이 표류하게 내버려두면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생각에 갑갑해 지는 것이다. (153쪽) 

 
그러나 저자는 프로빈스타운에서 돌아온 뒤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었던 것. 테크 기업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참여'시키는 상품을 개발해 수익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사람들의 주의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메일이 올 때마다 알람을 울렸고 인스타에 필터를 추가했으며 무한스크롤을 통해 소셜 미디어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은 우리에게 이 서비스들을 공짜로 제공하면서 우리의 말과 검색기록을 스캔해 광고주에게 넘기고 있다. 이 '감시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우리는 그 사이트를 되도록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주의력을 빼앗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마트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스마트폰 앱과 노트북의 웹사이트가 설계되는 방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시스템은 우리의 정신을 길들여 잦은 보상(좋아요, 하트)을 갈망하게 만들며, 평소보다 더 전환을 자주하게 한다. 또, 우리가 무엇에 반응하는지(우리의 트리거)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우리를 뚫고 들어오며 자주 화나게 만들어 더 얄팍하게 사고하게 만든다. 또 우리가 타인의 분노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우리를 과각성시키며 가짜뉴스를 퍼뜨려 사회 전체의 집중력을 파괴시킨다. 우리는 합리성과 지성, 집중력을 잃으며 '집단 퇴화'하고 있다. 
개인이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방해 금지 버튼 등) 가벼운 변화를 시도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군본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잔혹한 낙관주의'일 뿐이다. 사회구조적 원인을 외면하고 개인에게 탓을 돌리게 만든다. 자제하면 되잖아? 왜 그걸 못해?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다수를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없다.  
 

언젠가 제임스 윌리엄스(前 구글전략가)는 일류 기술 설계자 수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며 "현재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싶은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강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9쪽)

 

이들(테크 기업)이 실제로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일관된 핵심원칙이 하나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들 정보를 준다. 그게 다다. 우리가 화면을 더 많이 들여다 볼수록 그들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는 사신을 기억하자. (202쪽)

안타깝게도 인간의 행동에는 기이한 특성이 하나 있다. 대체로 우리는 긍정적이고 잔잔한 것보다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훨씬 오래 바라본다. 우리는 길가에서 꽃으 나눠주고 있는 사람보다 자동차 사고를 훨씬 오래 구경할 것이다. ... 이를 '부정 편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그러므로 우리를 화면 앞에 붙잡아두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알고리즘은 우리를 화나고 격노라게 만드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분노를 많이 일으킬수록 참여도는 높아진다.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분노하는데 쓰면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증오를 습관화'한다. (203-204쪽)


 "자제력을 키우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화면 반대쪽에는 우리의 자제력을 꺾으려고 노력하는 천여 명의 엔지니어들이 있습니다." (240쪽)

 


 

테크기업에 대한 고발,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 

 

감시자본주의를 금지하고 지금과는 다른 사업 모델을 마련한다면,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우리의 뜻깊은 목적에 기여하도록 일한다면, 문제는 해결되겠으나 현실에서 그런 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세상을 바꿨듯이,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나가듯이, 우리는 싸움에 나서기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먼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 이를 위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환경을 제한하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점차 늘어나는 경제적 불안정에 대해 핀란드의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할 경우, 집중력이 크게 개선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 사회 근무시간의 증가는 사람들을 산만하게 하고 생산성을 낮춘다. 주4일제 시도로 온전한 하루를 추가로 받은 사람들은 이 시간을 다른데 쓰며 만족도를 높였고 기운을 회복하고 컨디션을 회복했다. 휴식을 취한 뒤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 인간이 설계된 방식이었다. 근무 시간 외에는 업무 연락 등으로 연결되지 않을 권리도 되찾아 주어야 한다. 
또, 현대 식생활의 변화는 건강 뿐 아니라 집중력도 위협한다. 가공식품으로 에너지를 급상승시켰다가 급하강시키는 과정에서 우리의 머리속은 뿌옇게 되며, 그 안에는 뇌를 발달시키고 기능하게 할 영양분이 없다. 뇌는 음식 섭취를 통해 만들어 지는데 말이다. 게다가 화학물질이 듬뿍 들어간 음식은 과잉 행동의 가능성을 높인다. 대기오염과 화학물질에의 노출 역시 신경세포를 손상시키는 등 뇌에 영향을 미친다. 집중력 킬러는 이렇게 주변 어디에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외부세력에게 공격받고 약탈 당하고 중독되는 우리의 집중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적인 규제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들을 규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멈춰서서 '이게 옳아?'라고 묻지 않은 채 우리의 슈퍼 컴퓨터가 서서히 우리의 모둔 취약점을 파악할 방법을 찾게 될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사실은 주체성과 자유 의지가 직격탄을 맞게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한다. (265쪽)

 

과각성은 본질적으로 가는 곳마다 곰을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잠재적 위험의 단서에 맞춰져 있어요. 현재 일어나는 일을 느끼거나, 배워야 할 수업을 듣거나, 해야할 일을 하는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이) 집중을 안하는게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위험의 단서나 증거를 찾는데 집중하고 있는거죠. 초점이 거기에 가 있는 거에요." (274쪽)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규모만큼 그들에게 제공하는 수단의 규모를 키워야 한다. (283쪽)


많은 사람이 소진될 때까지 일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칭한다. 갈수록 빨라지는 속도의 토대 위에 있는 문화에서 속도를 줄이기란 힘든 일이며, 우리 대다수가 그렇게 할 때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함께 사회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301쪽)

 


 

나도 ADHD? 스트레스 관리부터!

 

ADHD는 유전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다. 아이들은 전처럼 뛰어 놀지 못하고 집이나 교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오염물질 가득한 세상에서 전과 다른 식단을 먹고 시험 위주의 학교 교육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모든 요인들이 ADHD 진단을 늘릴 수 있다. 부모들이 받는 큰 스트레스도 ADHD를 늘리는 중요한 요인이다. 유전자의 영향도 물론있겠지만, 유전자는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ADHD는 진단이 아닙니다, 이따금 동시에 발생하는 특정 행동들의 묘사일 뿐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가 ADHD를 진단받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아이가 잘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그 말은 '왜'라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아이가 기침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아이의 기침 소리를 들은 뒤, '그렇군요 아이는 기침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가 아이에게서 집중력 문제를 확인한다면 그것은 진료 과정이 끝이 아니라 첫 단계여야 한다. (351쪽)

 

어릴 때는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자신을 달래주고 진정시켜 줄 어른이 필요하다고 성명했다. 이렇게 위로받는 경험을 충분히 하고 나면, 시간이 흘러 성장할수록 혼자서 자신을 달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가족이 주었던 안심과 이완을 내면화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쌓인 부모는 자기 잘못이 아닌 다른 이우로 자녀 달래기를 힘들어 하는데, 본인이 너무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의 자녀도 중심을 잡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그들의 자녀는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는 방식으로 힘든 상황에 대처한 확률이 높아지고, 분노와 괴로움은 집중력을 망가뜨린다. (353쪽)

절대다수는 ADHD를 타고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ADHD가 나타나는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이다. (354쪽)

 

"주변에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앨런의 팀이 연구한 가족들은 때떄로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준 사람은 대개 전문가가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힘이 되는 파트너나 친구들을 찾았을 뿐이었다. 연구팀은 이런 식으로 사회적 지지가 늘어가면 "그들의 자녀가 문제를 보일 가능성이 더 낫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부모는 자기 아기에게 관심을 많이 쏟을 수 있으며, 그러면 아기는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 이러한 효과가 너무 커서, "긍정적인 변화의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는 그 시기에 부모가 받는 사회적 지지가 증가했는가였다." (354쪽)

 


 

뛰어다니며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박탈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나게 하며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아이들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내재적 동기가 아닌 외재적 동기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다. 어떤 학교에서는 일년에 하루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며 마음껏 재미를 찾는 것이 허용되는 날을 만들었지만, 늘 어른들 손에 집중력을 관리 당해온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 시간이 주어지자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했다.
서드베리 밸리스쿨은 교사도, 수업도, 교육과정과 수업, 시험이 없는 학교였다. 학생들은 스스로 체계를 만들었고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웠다. 규칙을 스스로 만들며 민주적으로 지켜나갔다. 학생들은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며 배우고 있었다.   
결국, 아이들이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가 아이들을 위한 만든 이 세상의 잘못이다. 어른들은, 자신이 어린 시절 가장 사랑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다른 어린 시절을 주어야 한다. 스스로 놀고 싶은 것을 찾아 놀게 하는 것, 그것에 푹 빠져들게 하는 것- 스마트폰이나 게임이 아니라- 그렇게 집중하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어른들이, 교실이, 학교가 해야하는 일이 아닐까.

 

어른 없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는 "일이 벌어지게 만드는 방법을 파악"해야 한다. 놀이를 생각해내려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떠올리 놀이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고 다른 아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게임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아" 낸다. 아이는 언제가 자기 차례이고 언제가 다른 친구 차례인지 협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므로 타인의 필요와 욕구, 그것들을 충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아이는 실망감과 좌절감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다. 이 모든 것을 "배제되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고, 길을 잃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379쪽)

 

놀이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아동발달의 세 부분이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창의력과 상상력. 아이들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두번째 부분은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어울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사회적 유대"이며 세번째 부분은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는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는 인간이 되는데 추가적으로 따라붙는 사소한 요인이 아니라 그것(제대로 기능하는 인간)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380쪽)

 

통달이라고 칭하는 감각, 즉 자신이 무언가에 능숙하다는 감각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감각은 기본적인 심리 욕구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고 느낄 때는 그 일에 집중하기가 훨씬 수월하고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낄 때는 집중력이 소금에 전 달패이처럼 쪼그라든다. ... 나는 현재 우리의 학교 제도가 너무 편협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잘 할 수 없는게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의 학교경험은 무능하다는 느낌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무언가를 스스로 통달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자 집중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391쪽)

 

작가 닉 도널드 월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삶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393쪽)

 

(서드밸리 학교 학생의 말)저는 사실 정보 하나하나를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별로 안받아요. 핵심 아이디어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뇌 안에 남아  있을거라고 믿어요. 시험이 없다는 것도 내 시간을 배우는데 쓸 자유를 줘요. (399쪽)

 

피터는 대부부의 인류 역사상 아이들이 서드베리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학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렵채집 사회(진화의 측면에서는 그저께라 할 수 있는 시기까지 인류가 살았던 방식)의 아이들에 관해 지금까지 쌓인 증거를 연구했다. 수렵채집 사회의 아이들은 놀고, 배회하고, 어른을 모방하고, 질문을 엄청 많이 하며, 정식 교육을 별로 받지 않고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유능해진다. 피터는 역사에서 예외는 서드베리가 아니라 현대의 학교라고 설명했다. (401쪽)

"억지로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안드니까 의욕이 생겨요." 해나의 이 말은 성인과 아이 모두 의미있는 일일수록 더 쉽게 집중하고 배운다는 광범위한 과학적 증거에 잘 들어맞는다. 표준화된 교육은 학습의 의미를 너무 자주 없앤다. 이와 달리 진보적인 교육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불어넣으려 한다. (403쪽) 

 


집중력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집단을 조직해 대항하는 것. 우리의 집중력에 불을 지르고 있는 세력에 맞서 우리의 치유를 돕는 힘으로 그 세력을 대체하는 것이다. '현장전투'라는 이름으로 화력발전소 설립을 저지한 이들처럼 '집중력 반란'으로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 정신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사실 집중력 박탈의 여러 원인들을 가져온 근본 힘은 '성장 위주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장과 가속을 향한 믿음은 인류를 생태적 한계 너머로 밀어내고 있기도 하다. 집중력 위기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집중력 위기를 해결할 때만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제임스는 몇 년간 집중력을 연구한 뒤 집중력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세가지를 전부 빼앗기게 되었다고 말했다. 집중력의 첫번째 층은 스포트라이트(즉각적인 행동에 집중하는 것), 스타라이트(=별빛/장기 목표, 시간이 드는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집중력), 데이라이트(=햇빛/장기목표를 파악하게 해주는 힘, 자신과 주변상황을 명료하게 볼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데이라이트의 상실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산만함이며 우리가 분열되기 시작할 수도 있다. ... 우리가 별빛과 햇빛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찰과 공상, 사색을 지속할 때 뿐이다. 제임스는 집중력 위기가 우리에게서 이 세가지 형태의 집중력을 전부 빼앗아 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빛을 읽고 있다.
제임스의 아파트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거리를 걸으며 네번째 형태의 집중력이 있지는 않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네번째 집중력을 스타디움 라이트, 즉 경기장의 빛이라 부르려 한다. 스타디움 라이트는 서로를 보고, 서로의 소리를 듣고, 집단의 목표를 세워 이를 이루고자 함께 싸우는 능력이다. (409-411쪽)   

 
 

우리의 집중력이 잘 자라서 잠재력을 온전히 피우내려면 특정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성인에게는 몰입이 필요하고, 책을 읽고, 자신이 집중하고 싶은 유의미한 활동을 찾고,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이 배회할 공간을 마련하고, 신체 활동을 잘하고, 잘 자고, 뇌가 건강하게 발달할 수 있도록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안정감을 느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집중력을 방해하고 성장을 막기 때문에 차단해야 할 것들도 있다. 지나친 속도와 전환, 지나친 자극, 우리를 공격하고 중독시키는 침략적 기술, 스트레스, 탈진, 우리를 각성시키는 식용색소로 범벅인 가공식품, 대기오염이 그러한 것들이다. (420쪽)

기후 위기는 해결 가능하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깨끗한 녹색 에너지원으로 사회에 동력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분별력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3분만다 작업을 전환하고 알고리즘이 불어넣은 분노 때문에 늘 서로에게 고함을 치는 정신없는 인구집단은 이 해결책을 실행할 수 없다. (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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