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해'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가난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고 싶은 걸 못했던 상태, 뭔가 채워지지 않았던 기분을 그렇게 표현했던 듯하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질 정도로 나에게 가난은 실체 없는,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지금도 불충족의 '가난' 상태는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그 단어, 가난.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예스24
“처음 만날 때는 열예닐곱 살의 청소년이었던 이들이지금은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었다.”10년간 정성스럽게 기록된 가난과 성장의 시간들25년 경력의 교사이자 청소년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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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인터뷰한 여덟 명의 (이제는 청년이 된) 청소년들에게 '경제적 어려움' 외의 공통점은 없다. 가족 상황이 다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교육 및 복지 시스템에의 접근 가능성도 달랐다. 그러나 진짜 달랐던 것은 이들의 내면이었다. 단단한 자아, 높은 자존감을 가진 청소년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 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단단함을 만들어 낸 건 홀로 성찰하고 사색하는 힘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나아가는 힘이 있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갖가지 방식으로 '어려움을 딛어 내며' 어른이 된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과연 어른이 되었는가 되물어본다. 이거 원... 빈곤과 교육, 복지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을 자기계발서로 읽다니. 난, 아직 너무나 개인주의다.
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는 자신이 그동안 알게모르게 누려온 것들에 감사(?)하게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들의 어른되기에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성긴 교육, 복지, 노동 정책에 대해 분노할 것이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소심한 몸짓으로 이들의 앞날을 응원해 본다. 그리고 말해 주고 싶다. "니들에게 한 수 배웠어!"
경제학자로서 평생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연구해 온 아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라고 설명했다.(38쪽)
수정이 꿈꾸는 이래의 삶은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과 그것이 보장되는 여유였다. 빈곤은 '단순히 낮은 소득이 아니라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 역량은 '개인이 가치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이다. (146쪽)
가장 놀라운 점은 지현이 빈곤 상황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겪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한 점 불편이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모두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서 바라보고 오히려 장점으로 이용했다.(80쪽)
이런 제반 조건을 고려한다면, 지현네 가족은 정말 영리하고 지혜롭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일단 '나;라는 개인의 존재와 가난한 상황을 분리해서 '나'의 사회적 정체감에 훼손을 주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했도 도움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호소했다. ... 단순히 필수적인 생존 자원을 끌어오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려 했고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긍정할 줄 알았다. '생존하는 나'를 넘어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있게 살아가는 나'를 추구할 줄 알았고 이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에너지가 풍부했다. '빈곤'은 그저 나를 둘러싼 여러 장애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개인의 부족함으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95쪽)
나는 우리 사회가 외적인 지식(예를 들어, 학력)과 외형적 모습(예를 들어 직장, 재산)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하면서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적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의 교육체계는 청소년에게 이 성찰하는 힘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교육과정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저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어서 시간 내에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나틑 점수를 받아야 성공하는 교육체계를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공적으로 빈곤을 극복한 청년들은 이런 교육체계 안에서 성찰하는 힘을 기르고 자신이 가치체계를 만들어냈다. 성찰하는 힘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시각과 신념을 구축했다. 이 빈곤 청소년들은 학업 성취가 낮고 당장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지만 자신만의 단단한 핵심을 갖고 있었다 . 그들은 '생존'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면서 성찰하는 힘을 길러왔을 것이다.(97-98쪽)
연우가 이렇게 변한데에는 겉으로는 무기력해 보였지만 내면에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연우는 자신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고, 충실히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을 이어갔다.(115쪽)
연우를 비롯한 많은 청소년들이 그렇겠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가고 색깔을 발견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쉽지 않다. 청소년들의 중요한 과업인 자아존중감 찾기는 누구에게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품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가난한 가정의 청소년들이 주변에 안정적으로 돌봐줄 지지체계가 부실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에게 이 과업 달성의 과정은 아픔과 혼란이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본 아이는 이후에도 자신의 길을 걸어갈 줄 안다. 그 시간이 자아존중감을 길러주는 자양분이 되기 떄문이다. 연우는 그 길을 걸으며 사색의 깊이를 더해갈 것으로 보였다.(121쪽)
우리 청소년들은 좌충우돌하며 성장하고 변화한다. 모든 성장과 변화가 성공적으로 찬란하지 않기 때문에 한때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충분히 줘야 한다. 아직 가능성이 풍부하고 변화할 여지가 많은 청소년들에게 포용적이고 너그러운 태도를 갖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함께 기르고 돌보는 공동체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미덕이다.(192쪽)
우빈은 자신의 우울한 과거도 어머니나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돌봄의 공백도 쉽게 인정하고 쉽게 수긍했다. 어두웠던 시절을 냉정하게 돌아본 마음의 여유도 있고, 그 기억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있어 보였다. 우빈은 그만큼 내면이 단단하고 자기 생각이 있는 청소년으로 보였다. '금수저', '흙수저'란 사회적 용어에 대해서도 현실이라고 담담하게 반응했다.(221쪽)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사교육과 입시 정보 등으로 대표도는 가족의 뒷받침 없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빈곤층 청소년들은 취약한 가족 자원 때문에 학교에 의존해야 하는데, 학교가 가족 배경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사다리를 걷어차는 ' 제도인 셈이다. ... 청소년 복지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체계는 이제 학력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 자아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체제로 거듭나야 한다.(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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