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우크라이나 통치
소련 치세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시도했고 소련은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 러시아인들은 그 전에도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체를 부정하고 러시아의 일부이자 변방으로 생각한다. 트로츠키-스탈린 시대를 거치며 계속된 소련의 탄압 속에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반러시아 감정이 심화되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 2. 우크라이나의 반러시아 감정 + 나치화(?)
반러시아 감정의 연원 1. 홀로도모르
스탈린이 실시한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다. 그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다. 1932-33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만 250만-350만명이 기아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소련 초기 스탈린의 폭정이 만들어낸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인한 집단적 사망을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어로 '굶겨 죽인다'는 뜻)라 부른다. 여러 국가에서는 이를 소비에트 정권이 행한 제노사이드로 공식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집단농장화 정책에 가장 반발이 컸던 우크라이나가 기근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았던 것에 대해 우크라이나 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약화를 위한 소련의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년 11월 넷째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희생자 추모 기념일로 지정하여 희생자를 기라고 있다.
반러시아 감정의 연원2.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UN)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은 우크라이나 독립투쟁을 위해 결성되었다. 그러나 점차 극우 파시즘 운동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들은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상대로 학살을 벌였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소련 정책을 펼치는 나치와 손을 잡은 것이라 볼 수도 있고 단일민족 우크라이나 건설을 위해 소수민족을 제거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 단체의 중심에는 스테판 반데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 스테판 반데라가 나치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나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 나치가 우크라이나 독립을 승인하지 않자 그는 나치의 요구를 거부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이 나치에 동조해 유대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학살을 벌이던 시기, 반데라는 강제수용소에 있었으므로 학살에 직접 간여한 바 없다.
2. 스테판 반데라는 철저한 극우 인종주의자로 폴란드인과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고 그의 성향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을 인종편견으로 물들게 했다. 2차대전 기간 우크라이나 저항군은 폴란드인 5만-10만명을 학살하고 유대인을 독일군에 넘겨주는 앞잡이 노릇을 했다. 반데라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TMI. 이후 독일은 소련군 저지를 위해 반데라를 석방했고 2차대전 종건 이후 반데라는 우크라이나 지하저항조직을 이끌며 공산세계에서 반공운동을 펼쳤다. 냉전시대에 돌입하자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에서 첩보작전을 펄치는 등 반소련투쟁을 이끌었다. 덕분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리고 1959년 뮌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소련 KGB 요원이 살포한 독극물 암살이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영웅으로 부상했다. 2010년 유센코 대통령은 영웅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이 심했고 다음 선거에서 그가 낙선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2011년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훈장 수여 결정을 무효처리했다. 이후 포로셴코 정권은 다시 영웅 칭호를, 젤렌스키 정권은 이를 또 거부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식입장은 그의 공적 일부를 인정하긴 하나 국가적 영웅으로 기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폴란드와 이스라엘에서는 인종주의자로, 러시아에서는 파시스트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반데라 등의 나치 행적을 자신들의 프로파간다에 활용하고 있는데,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데라 추종 세력을 처단하는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내세웠다.
스테판 반데라, 그는 독립 영웅인가, 인종주의에 물든 학살자인가?
역사는 참 어렵다.
소련 해체, 우크라이나 독립
1991년 소련이 해체와 함께 소련 내 15개국이 독립했다. 우크라이나도 독립투표를 통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그간 소련의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계속 넓혀줘 왔다. 레닌이 우크라이나 동쪽 땅을, 스탈린이 서쪽 땅을, 그리고 흐루쇼프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넘겼다. 행정편의상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한 의도였으며 어차피 소련 체제 내에 있으므로 우크라이나 관할로 넘겼다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와 함께 독립하면서, 이 문제는 지금까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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