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름 싸이전주(賽珍珠), 한국 이름 박진주. 그녀의 원래 이름은?
미국의 소설가 펄 벅(1892-1973)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뒤 생후 3개월 만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10대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다가 미국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중국화된 사고방식 때문에 미국 생활을 힘들어 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미국인 농학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의 무관심, 정신지체를 가진 딸에 대한 케어를 힘들어하며 고통을 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이 경험을 통해 중국에 사는 미국인으로 자신을 자각했고 이를 이후 작품에 녹여내게 된다. 1930년 첫 작품,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일년 후인 1931년, 펄벅에게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가져다 준 그 책, <대지>를 발표했다. <대지>는 농민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대지주가 된 왕룽 일가의 역사를 그린 3부작 장편소설로 근세 중국을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후 속편으로 <아들들>, <분열된 집안>을 발표했고 이 3부작은 <대지의 집>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으며 퓰리처상, 그리고 193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동서양 문화를 연결했다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여성작가로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은 펄벅이 처음이었다.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중국을 떠난 펄 벅은 미국에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과 함께 인권 운동에 전념했다. 미국 내 인종 차별 문제에 맞서 소수민족의 인권 개선을 위한 동서협회를 만들었고,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과 가난 속에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를 창설했다. 그녀 역시 이 기관을 통해 피부색이 각기 다른 7명의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국 병사들이 아시아 국가에 주둔하며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한 펄벅 재단을 세웠다.
펄벅, 한국에 대한 애정
펄벅은 한국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다. 1963년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소설 <살아 있는 갈대>를 펴냈고 1967년엔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한 <새해>도 출간했다. 펄벅재단도 한국과의 인연 속에 창설되었다.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벅이 소설 자료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되었고 196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만든 재단이 펄벅재단이다. 현재 전세계 11개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혼혈 아동, 고아, 신체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경기도 부천에 유한양행 소사 공장이 이사를 가자 유일한의 도움을 받아 그 부지를 매입, '소사희망원'을 건립하여 보호자가 없는 혼혈인과 전쟁 고아들을 손수 돌보기도 했다. 소사희망원은 1975년 폐쇄되었지만 2006년 부천문화재단이 부지 일부를 매입하여 소사희망원 건물 한 동을 복원,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한국펄벅재단
H.E.L.P 프로그램을 통하여 다문화가정과 아동을 지원하는 사회복지법인
www.pearlsbuck.or.kr
펄벅, 중국을 그리워하다.
펄벅의 사회인권운동은 미국 내 반공주의자들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펄벅은 비판받는 인물이었다. 마오쩌둥 정권 하의 공산주의 중국에서 펄벅은 '제국주의 시각으로 중국을 왜곡한 작가'로 규정되어 입국이 불허되었고 미국-중국 간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며 성사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도 펄벅의 반공산주의적 입장 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 정부의 거부로 방문이 무산되었다. 중국 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이루지 못한 채, 1973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펄벅, 서태후를 그리다 - <연인 서태후>
실제 서태후는 어떤 사람?

청나라의 아홉 번째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갔다. 황제의 첫 아들을 낳으며 지위가 점점 높아졌고,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죽고 아들 동치제가 6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황제의 어머니, ‘황태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금성의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쪽의 태후, ‘서태후’라고 불린다. 서태후는 어린 황제인 동치제를 대신해 청의 정치를 장악한다.
동치제가 어머니인 서태후와의 갈등 속에 방황의 길을 걷다 사망하고 며느리마저 자살한 뒤, 서태후는 자신의 조카인 4살짜리 광서제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광서제는 1889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던 황실정원, 이화원을 11년에 걸쳐 복원하여 서태후에게 주었고 서태후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청 해군의 군자금을 빼거 이화원의 복구와 확장에 썼다는 설이 전해진다.
광서제가 캉유웨이와 손잡고 실시한 변법자강운동을 막기 위해 서태후는 정변(무술정변)을 일으켰다. 광서제를 자금성에 유폐하고 변법 자강운동은 100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영국와 프랑스가 광서제를 지지하자 서양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의화단의 반외세 운동을 지원하고 서양에 선전포고까지 했으나 서양 8개국 연합군이 청에 입성해 모조리 진압하였다. 몇 년 후인 1908년 광서제가 38세의 나이로 사망하는데, 최근 광서제 유해 확인을 통해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독살의 배후에는 서태후가...? 황제의 자리에는 이미 3살 어린이 푸이를 내정해 놓았다.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이다. 푸이를 황제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이어나갈 계획을 세웠던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72세 노령으로 인한 이질이 원인이었다.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서태후가 죽고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다. 그리고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3백년 간 이어져온 청은 멸망한다.
서태후에 대한 소문들
사치스런 생활
손톱을 장식하는 호갑투(손톱보호대), 한번 신고 버리는 버선, 한번 신고 버리는데 비단과 금실로 장식한 수건, 진주 망토, 과일 디퓨저, 각종 보석들(수박 보석, 동파육 보석), 한끼 식사에 120여 가지 요리(농민 1년 식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 요리 좋아함, 전용 열차에는 16칸 열차 중 4칸이 주방, 나라 1년 예산의 1/3을 쓴 생일파티
피부미용에 대한 관심
옥용산(새똥으로 만든 화장품), 진주 갈아먹기, 산모를 불러 모유 마시기, 머리 빗긴 궁녀가 머리카락 빠지게 하면 처벌
젊은 남자를 잡아먹는(?) 남자킬러
남자들은 다음날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북경에 미남이 없다는데...;;;)
'세계역사 훑어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의 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 -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스테판 반데라, 우크라이나 독립 (0) | 2023.05.27 |
---|---|
[세계의 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1) - 키이우 루스, 코사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0) | 2023.05.27 |
[세계의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3) : 오슬로 협정,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2차 인티파다, 50일 전쟁 (1) | 2023.05.12 |
[세계의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2) : 이스라엘 건국, 네 차례의 중동전쟁, 팔레스타인의 인티파타 운동 (1) | 2023.05.11 |
[세계의 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1) : 디아스포라, 시오니즘, 영국의 이중약속, 분쟁의 씨앗 (0) | 2023.04.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