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감독 : 데이비드 린 / 출연진 : 피터 오툴, 앤서니 퀸 / 상영시간 : 216분 / 국가 : 영국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 작품'(라이프 지)
- 제작비 2천만 달러, 5천마리의 낙타 동원
35회(1963) 미국 아카데미 7개 부문 수상
한국에서는 1970년 개봉, 1998년 재개봉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보국 소속 중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중동 지역에서 벌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기 위해 아랍 지역으로 파견된다. 이집트의 카이로를 출발해 수에즈 운하를 건너 아랍 독립군 지도자인 파이샬 왕자를 찾아 간 그는 아랍 전사들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 군대와 싸우며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 칭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터키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을 받게 되면서 자신도 평범하고 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영화의 역사적 배경
오스만 제국, 유럽의 왕자에서 유럽의 환자로...
오스만 제국은 17-18세기 발칸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까지 차지하고 다양한 민족을 다스린, 세계사에 있어 존재감 넘치는 제국이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펼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 속에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 있던 여러 민족들이 독립을 시도하며 오스만 제국은 더욱 위기를 맞았다. 그리스가 독립했고(1829) 알제리를 프랑스에게 빼앗겼으며(1830) 이집트도 영국,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독립(1841)했다. 이후 탄지마트 등 근대 의회 제도와 헌법을 도입하는 등 개혁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지만, 국내 보수 세력의 반발과 서양 강대국의 간섭으로 늘 좌절되었다.
1908년, 젊은 지식인, 장교,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청년 튀르크당 장교들의 혁명이 일어나 1913년 근대적 개혁을 실시했다. 청년튀르크당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정통성보다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워 튀르크의 발원지인 중앙아시아까지 치고 나가겠다는 야망을 내비쳤다. 오스만 제국의 청년들은 튀르크 민족주의에 열광했다. 그러나 극단적 튀르크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국내의 혼란은 더더욱 심해졌다.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 살아왔던 다양한 민족들은 튀르크 중심의 민족주의를 큰 위협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랍인들은 아랍 대로 민족국가 수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인 동맹국에 가담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그런대로 승기를 잡았지만 오스만과 맞붙은 레반트(지금의 시리아와 이집트) 전선에서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해군 주력의 영국군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광야 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아랍 부족들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과 아랍 사이에 비밀 협정이 하나 체결된다.
후세인-맥마흔 협정
1915년, 아라비아 반도의 명문가, 하심 가문의 대표 격인 후세인 빈 알리는 영국의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에게 중요한 제안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아랍인들이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 데 힘써주는 대신에 전쟁 후 오스만 제국의 땅, 즉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레반트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 일대에 아랍 통일왕국을 건설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 사이에는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통의 편지가 오고 갔고 영국 정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을 이끄는 튀르크 민족과 아랍 민족은 같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오스만 제국(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랍 통일왕국을 세우겠다는 아랍인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 결실을 맺는다.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의 배경은
후세인과 맥마흔의 협상에 따라 아랍 부족과 손잡은 영국 장교가 오스만 제국과 싸워나가는 전쟁.
영국은 약속을 지켰을까? - 아니. 사이크스-피코 협정, 밸푸어 선언
영국은 1차대전 중 프랑스와도 협정을 맺는다. 전쟁 승리 후 레반트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통치한다는 비밀스러운 내용이었다. 심지어 후세인과 맥마흔이 편지를 주고 받는 기간과 겹친다.(아랍에게 약속하면서 프랑스랑 짝짜꿍 하고 있었던 것!) 이때 그어진 선이 현대 서아시아 국가들의 국경선이 되었다. 이 지역의 종교, 문화, 민족적 상황에 대한 인식 없이 자의적으로 그어진 선은 이후 지금까지 서아시아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편, 영국은 유대인에게도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전 세계 유대인들이 이에 반응하여 연합국을 지지하고 군비를 지원했다.
전쟁 후, 영국의 행보
세 협정의 당사자들은 다른 두 협정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후세인의 아들 파이잘이 시리아의 왕으로 세워졌으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그 땅을 차지한 프랑스에 의해 내쫓겼고 영국은 이라크라는 나라를 세워 파이잘을 국왕으로 임명했다.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밸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아랍 민족의 통일 국가를 세워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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